사람과 자연의 긴밀한유대

사람과 자연의 긴밀한 유대(紐帶)
토요일 마다 밭으로 나간다.
농사(農事)를 지어보니 참 많은 벗들이 생겼다.
벌 한통의 수천마리의 벌들이 정신없이 일하고 있고 하루 종일 처다 보아도 지겹지가 않다. 당장 몇일 후 꿀을 받아야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벌들이 열심히 일해 놓은 것을 인간들이 결국 뺏어 먹는 것이다.
이 또한 자연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일주일에 한번 씩 나가는 밭이라 엄청난 변화를 몸으로 체험을 한다.
깡마른 옥수수, 이빨로 힘을 주어도 깨물어도 꺼떡도 안든 옥수수가 예쁘고 귀여운 생명(生命)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내가심은 옥수수가 새로운 生命으로 탄생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고 친근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과 자연(自然)의 역사적(歷史的) 접촉(接觸)은 不滅의 흔적으로 남아 식물이든 동물이든 우리가 온갖 생물에게 친근함을 갖는 원동력(原動力)으로 작용하나 보다.
生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듯하다.
自然의 유대는 우리의 DNA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 이것이야 말로 생명애(生命愛) 가설(加設)의 핵심(核心)이다.
‘生命愛’란 살아있는 다른 유기체(有機體)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정서적 제휴(提携)라고 제안했다.
生命愛란 자기보존의 본능, 생명을 유지하려는 本能的 욕구(欲求)가 아닐까?
음양(陰陽)이 있고, 남녀가 있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고, 밤과 낮이 있다. 이렇듯이 자연의 조화는 신기하고도 오묘하다. 밭 귀퉁이에 피어난 노란 민들레도, 불어오는 바람도, 같이 먹자고 모여든 작은 벌레들도 모두 친구가 되었다. 참 으로 신기한 일이다.
동물이나 곤충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먹어야 살고, 그것으로 에너지를 얻고, 먹어면 배설하고 자연은 순환의 원리인 듯하다.
작은 감자 한 알을 땅에 묻고 초여름이 되니 한 바구니 가득 감자를 주워 담는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자연은 언제나 아낌없이 선물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도시(都市)아이들은 채소(菜蔬)를 마트에서만 만난다.
매일 먹는 삼시 세끼, 채소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연스레 우리는 밭에서, 자연에서 멀어져 버렸다.
작은 텃밭이라도 우리 손으로 직접 씨앗을 심고 가꾸는 정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아이 농부(農夫) 경험을 하여 본다면 어떨까?
말로 하는 생명애(生命愛) 보다 체험하는 생명애(生命愛)를 배우면 한 인간의 일생이 달라 질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發見)하게 될 것이다.
두 손으로 흙을 쓰다듬고 작은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농사(農事)의 즐거움에 푹 빠져들게 마련이다.
자기가 직접 가꾼 채소를 요리한 밥상에 앉아 언제 자연을 식물을 외면했느냐는 듯 맛있게 먹겠지요. 아마 우리 어린 농부들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맑은 얼굴로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고마움을 배우는 착한 어린이가 될 것이다.
“農事가 藝術입니다.” 그리 예술(藝術)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명 한 생명에 큰 축복(祝福) 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자라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큰 축복 이였다.
자연에서 농촌의 소일하는 것을 격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대부분 야외 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어린 시절이 지금 생각하니 행복 이였고, 기쁨 이였고, 호기심대로 사소한 경험도 하면서 자라온 것은 행운 이였다.
정말 매력적인 삶이였고, 평온(平溫)하고도 여유(餘裕)로운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체험(體驗)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간다.
자연과의 삶 생활접촉 속에서 인간이 태어났고, 자랐고 느끼면서 살아왔기에 우리 뇌(腦)는 여러 世代동안 지속되어온 생활의 경관(景觀)을 인지(認知)하는 준비(準備)가 되어 있는가 보다. 현대에서는 과학적(科學的)인 문화(文化) 속에서 생활(生活)하면서 생명애(生命愛) 반응이 위축(萎縮) 되었으나 은연중(隱然中)에 여전(如前)히 존재(存在)함을 느낄 수 있다.
自然도 體驗하고 漢文도 뜻글자라 體驗해보고자 몇 자 썩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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