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자연

소중한 자연
 
소중한 자연과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과거에 우리의 생활은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존귀하게여기며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기술이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능력은 점점 커져만 가서
더위는 에어콘으로 이겨내고, 추위는 난방 기구를 이용하여  기온을 사람들의 각자 좋아하는 온도로
조절하여 살면서 인간 능력이 기술 만능시대를 맞은 것이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아오던 반면에
현대에 와서는 많은 경우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의 이익에 맞추어 자연의 질서를 무리하게 요구하며 사람 중심으로 뒤바꾸며 살아온듯하다.

내가 살든 고향은 시골 이였다. 아주아주 옛날 1차 산업이 주가되었던 시절은 대부분 시골사람이었으니 시골 일들 시골 환경을 다들 잘 알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3차산업을 지나 4차산업을 이야기하며 살아가는시대인 만큼  누구나 도시 사람이기에 누구나 시골 일을 다들 잘 모르고 1차 2차 산업에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웃지못할 일가운데  쌀나무는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에 대답하기조차 민망한 적도 있다.
 가 막히는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사람 들이 더 많이 만들어 질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친환경적 1차 산업을 이야기 하면서 채소와 곡물을 이야기 하자면 화부터 날 것이다.
참살이의 삶도· 유기농  자연농업에관한 이야기도,· 친환경적인 농사일도 모르는 시골사람이 있고, 시골 일을 스스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농사법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모르는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식물의 다양성, 동물의 다양성을 언제 이야기 하였지만 다양한 풀들과 작은 동물들이 동시대에 살아야 서로 도움을 주며 살아갈수 있다. 우리가 기르는 채소가 동시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의 보전에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식물들이  보통 반년을 살다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자리에 다음 생명의 무대가 되고 지구촌의 삶이 변화와 더불어 에너지를 불어 넣을 것이다.

여하간
한쪽에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환경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생태, 친환경, 웰빙 따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으로 알고 그 삶이 진리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우리들의 삶이 모순이 아닐 수가 없다.
자연환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행하는 웰빙의 자연주의는 그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스쳐 가는 한 순간의 유행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인공적인것이 많이 연구되고 생산도고 있는가? 자연적인것도 비자연적으로 비용들여 만들어 가며 살아가고 있는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거친 반면에 더운 지방의 사람들은 온순하나 근면하지 못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환경가능론’이 있다. 인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자연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보고 동일한 자연환경도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문화수준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지며 자연은 단지 인간에게 가능성을 제공할 뿐이라는 ‘환경가능론’을 주장한다.


이런 말이 있다 가장 값싼 쌀은 농약을 가장 많이 친 쌀이다.
가장 비싼 쌀은 농약을 치지 않은 쌀이다. 농약을 덜 칠수록 쌀은 값이 비싸다고 하고, 농약을 하나도 안 치고 유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더 비싸다고 하며, 유기농조차 아닌 자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가장 비싸다고 한다. 왜 그러할까? 사람이 좋아하는채소 나뭇잎은  벌레들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것은 우리보다 후각이 감촉이 좋은 벌레들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농약도 비료도, 유기질이라고 하는 거름조차 사람 몸에는 안 좋은것을 도시 소비자 또한 스스로의 몸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지식으로는 아직 잘 몰라도 몸은 먼저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몸에 좋지않은 유독성 농약은 대부분 사용하지 않으니 고마운 일이다.

꽃이 피고 나비와 잠자리가 춤추는 논밭에서, 부드럽고 맑게 퍼져가는 공기속에서 하늘 아래 바람이 스치고 물결이 빛나는 해변에서, 녹색으로, 노랑색으로 붉은 색깔을 바꿔 가며 물 드는 수풀과 숲에서, 생명 있는 것으로서 대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즐겁고도 기쁜 나날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은 해충과 익충을 구별하는 것을 잘 알지 못하여 전체인 자연계의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골에 살고 있어면서 우주를 얻지못하고, 자연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평안과 평화에 다다를 수 없다.
 또한 도시의 소비자와 시골의 생산자는 일체의 존재다. 예부터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을 아꼈다. 예부터 시골에는 잡초가 없었다. 도시가 생기고 도시 문명이 퍼지면서 잡초라고 하는 뜬금없는 말이 불쑥 나왔다고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언제나 그냥 이었다. 소나 돼지나 염소나 토끼나 닭은 풀을 뜯어먹는다.
소, 염소, 토끼는 풀이 주식이다. 집 짐승뿐 아니라 숲 짐승도 풀을 뜯어먹는다.
​동물들에게는 봄,여름, 가을,겨울 언제나 풀이 주요 먹이였다. 숲이 다양하고 숲이 잘 보존 되었다면 산짐승이 구태어 인간이 사는 곳 마저 넘보지 않을 일이다.
시골이 무너지면 도시가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모두 생각하지 않는다. 시골이 망가지면 시골만 못사는 줄 도시민들이 착각하고 있다. 도시가 무너진대서 시골이 무너질 일은 없지만, 시골이 무너지만 도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 사람이 먹을 온갖 곡식이랑 풋성귀랑 열매를 농사짓는 시골이 무너져서 사라지면 정말 도시는 어떻게 될까?
끔찍할 것이다.
자연이 좋다. 옛날이 좋다. 그래서
교육 문제도 차라리 70년대 교육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 개발교육이 아니라  타고나지 않은, 하고 싶지 않은,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이 시간 낭비라 생각이 되어 지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내용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잘배우고  대학에서는 전문학을 공부하는게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좋을 듯하다.
사람 사는 환경에서  사람을 위하는 제도가 아니고,  사람 사는 환경에서  사람을 위하는 동조가 아닌 동떨어진 삶 같다.

 그러면 자연과 동조하면서 함게 그리 살아 갈수는 없을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살맛나는 행동과 맛으로 살아 간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잘나서 잘해서 즐겁고 재미 있는 줄 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대단하고 최고의 존재인줄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자연이 그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을 당신은 느끼는가?
자연의 마음을 그대는 어루 만저 보았는가?
자연의 미소를 그대는 느끼고  맛보았는까?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 들어갈 때 자연은 나를 얼마나 반겨줄까?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나의 탐욕에 자연은 얼마나 힘이들까?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 동물들의 삶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할까?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 소, 돼지 닭이 얼마나 행복할까?
인간의 셰계로 들어온 야생 조류는 얼마나 행복할까?
소는 송아지가 태어나 어미소 젖을 먹고 어느 정도 자라면 코뚜레 부터한다.
마취가 먼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비용 관계로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초원에서 자기네끼리 살아간다면 그리 혹한 위험은 없을 것이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태어 나자마자 위아래 턱의 송곳니 여덟 개가 절단되고 꼬리도 잘린다고 한다.
마취가 먼저 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알고 보니 돼지들에게도 못할 짓을 한다.
시민단체의 지적에 대해 과학축산은 어금니로 어미의 젖꼭지를 물어 상처 내는 걸 방지해야 하고 철분이나 영양이 부족한 새끼들이 장차 서로 꼬리를 물어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한다.
자연의 ​풀밭에 방목하는 가축에게는 불필요한 일이다.
외국 넓은 자연의 들판에서 방목되는 소들이 양들이 부럽기만하다.
자연과 함께 하는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사는곳에서 지금 풀한포기 나무한그루 아끼고 사랑하고
자연이 싫어하는 일회용 쓰레기를 적게 만드는 자신이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인듯하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나무 뿌리와 물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식물의 동물과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