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도 못하는 사랑
알면서도 못하는 사랑
식물들의 연리지 사랑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아는 것 만큼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아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전하고 진실한 사랑은 식물들이 하는 사랑 인 듯하다.
인간들의 자기의 욕심과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과 욕심이 상대의 사랑의 요구조건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입술 사탕발림의 사랑한다는 말 타령은 거짓된 위선일 뿐인 듯하다.
잠시 나마 영원할 것 같고 평생을 마음을 다해 사랑할 것 같다가도 인간의 욕심과 질투로 말미암아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잊고 자기 욕심이 앞설 때가 한 두 번이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인생이 기쁨으로 늘 충만할 수 없고 즐거움이 계속 될 수는 없음이다 그렇다면 사랑도 환경따라 순간하는 것이지 계속적이고 평생을 사랑이 아닌 원수를 이해하고 지낼 뿐 이기도하다.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하지 말고 자기를 비우는 사랑을 하여야할 것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 아니고는 영원할 수 있는 사랑이 없을 것 같다.
부모의 참 사랑만이 자식에 대한 온전하고 완전한 거룩한 사랑인 듯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참 사랑은 그 어디서도 찾지를 못하기에 늘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이 되어서 일시적인 쾌락과 유희를 즐기고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것으로 그 영혼을 만족 시키려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는 사랑은 늘 자신의 영혼을 갈망하게 할 뿐이기에 채워도 채워도 만족감이 없기에 더욱더 깊은 수렁의 늪으로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래 사랑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사랑에 갈급하고 사랑도 욕심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나무들은 어떤가 숲 속의 나무들은 좁은 공간을 나눠 갖고 살아간다.
나눔의 방법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 남보다 먼저 쑥쑥 키 자람을 하고, 가지와 잎을 잔뜩 펼쳐놓아야 한다. 자연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조금의 빈 자리라도 생겼다 하면 주위의 나무들은 우선 가지부터 들이밀고 본다. 서로가 부딪치면서 맞닿게 마련이다. 음지에 놓인 잎들은 조금이라도 빛을 더 받으려고 잎을 크게 만든다.
연리목은 흔히 나무가 자랄때 너무 가까이에서 싹이나고 휘어져 자란 탓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름이 굵어진 줄기가 맞닿아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연리지는 매우 드물게 생긴다. 가지는 햇빛을 많이 받도록 서로 피해 뻗으니 우선 서로 맞닿을 기회가 적다. 운 좋게? 운이 나빠서? 맞닿았더라도 바람에 흔들리면 서로 상대방의 세포와 사귀어보고 결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고려중기 이규보 시문집「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에는
“그대 비록 후배라 함께 공부 안 했으나/연리지 나무처럼 한집안 형제 같네…”, “난새는 짝 잃으면 못 떠나고 방황하네/ 초목 중엔 연리지가 의좋기로 소문나니/ 꽃 마음은 한가지나 꽃답기는 다르도다/ 부부가 없다면 짝이 어찌 될 것이며/ 형제 또한 없다면 기러기가 어이 줄서 가랴…” 하며 친구 사이의 우정과 혈육의 정을 연리지에 비유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도 “연리지 가지 끝엔 붉은 꽃/ 서러워라 내 인생 나무만도 못하구나
이렇게 연리지는 나타나는 것 자체가 희귀하며 사랑의 상징으로써 옛부터 상서롭게 여겨왔다.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연리지가 최근 잇달아 알려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자진해서 나타난 게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는 현장을 인간 들에게 들킨 것이다.
두 나무가 서로 가까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경우, 양분과 햇볕을 서로 나누다보니 어느 정도 지나면 약해진 쪽이 먼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로 붙어 한 몸이 되면, 죽어지는 쪽은 다시 살아나고 건강한 쪽도 더 활기차게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쳐지기 전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것이다. 즉 흰 꽃을 피웠던 가지에는 흰 꽃이, 붉은 꽃을 피웠던 가지에는 붉은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연리지를 한번 유심히 보자. 연리지 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모습 바로 세우기' 즉, ‘홀로서기'이다.
홀로서기란 우리가 흔히 쉽게 떠올리게 되는 혼자 살기, 떨어져 있기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될 정도로, 더불어 살기, 함께 숲을 이루기, 겉은 덕지덕지 어수룩하지만 안으로 수많은 다른 생명을 품기와 같은 그런 모습이다. 자연의 현상을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고 교만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곤충에게 식물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부지런하면서 겸손하고 침묵하면서도 검소하고, 자조적이면서 여유롭고, 알면서도 배우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마음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이 많다. 2015년 12월 31일이다. 잠시나마 나의 마음을 내려놓고 부모에게 가족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새해는 더 사랑하자
연리목은 흔히 나무가 자랄때 너무 가까이에서 싹이나고 휘어져 자란 탓에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름이 굵어진 줄기가 맞닿아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연리지는 매우 드물게 생긴다. 가지는 햇빛을 많이 받도록 서로 피해 뻗으니 우선 서로 맞닿을 기회가 적다. 운 좋게? 운이 나빠서? 맞닿았더라도 바람에 흔들리면 서로 상대방의 세포와 사귀어보고 결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고려중기 이규보 시문집「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에는
“그대 비록 후배라 함께 공부 안 했으나/연리지 나무처럼 한집안 형제 같네…”, “난새는 짝 잃으면 못 떠나고 방황하네/ 초목 중엔 연리지가 의좋기로 소문나니/ 꽃 마음은 한가지나 꽃답기는 다르도다/ 부부가 없다면 짝이 어찌 될 것이며/ 형제 또한 없다면 기러기가 어이 줄서 가랴…” 하며 친구 사이의 우정과 혈육의 정을 연리지에 비유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도 “연리지 가지 끝엔 붉은 꽃/ 서러워라 내 인생 나무만도 못하구나
이렇게 연리지는 나타나는 것 자체가 희귀하며 사랑의 상징으로써 옛부터 상서롭게 여겨왔다. 기록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연리지가 최근 잇달아 알려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자진해서 나타난 게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는 현장을 인간 들에게 들킨 것이다.
두 나무가 서로 가까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경우, 양분과 햇볕을 서로 나누다보니 어느 정도 지나면 약해진 쪽이 먼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로 붙어 한 몸이 되면, 죽어지는 쪽은 다시 살아나고 건강한 쪽도 더 활기차게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쳐지기 전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한다는 것이다. 즉 흰 꽃을 피웠던 가지에는 흰 꽃이, 붉은 꽃을 피웠던 가지에는 붉은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연리지를 한번 유심히 보자. 연리지 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모습 바로 세우기' 즉, ‘홀로서기'이다.
홀로서기란 우리가 흔히 쉽게 떠올리게 되는 혼자 살기, 떨어져 있기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될 정도로, 더불어 살기, 함께 숲을 이루기, 겉은 덕지덕지 어수룩하지만 안으로 수많은 다른 생명을 품기와 같은 그런 모습이다. 자연의 현상을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이기적이고 교만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곤충에게 식물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부지런하면서 겸손하고 침묵하면서도 검소하고, 자조적이면서 여유롭고, 알면서도 배우고 이해하며 용서하는 마음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이 많다. 2015년 12월 31일이다. 잠시나마 나의 마음을 내려놓고 부모에게 가족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새해는 더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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