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나무의 입을 이야기 하고 보니 나무의 얼굴 나무의 아름다음도 생각을 해 보고 싶다.
나무의 아름다운 기준은 어디를 기준 할까 하는 생각이다
나무의 입술, 아니면 나무의 얼굴! 나무의 얼굴이라하면 나무의 수형을 이야기 해도 될까?
나무도 동양사람 서양사람 아프리카사람이 각각 다르 듯 열대지방 아열대지방 온대지방 난대지방에 사는 나무들이 제각가 다들 사는 환경에 따라 수형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잎의 크기도 나무의 키도 다 제각각 일 것이다.
못먹고 못사는 나무들도 잘먹고 잘사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대충 살아가는 곳이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남한 수준이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구경 할수 있고 경제 사정도 중산층은 될 듯하다.
아카시아나무 같은 콩과 식물들을 옛 어른들이 지혜롭게 심어 두어 아카시아 나무덕분에 넉넉한 살림은 아니나 대충 남부럽지 않은 환경을 가진 것은 나무도 사람도 새마을 사방조림정신을, 노력의 덕을 톡톡히 보고있는 것이다. 거름기 한점없든 우리강산에 아카시아나무와 같은 콩과식물이 많은 수고를 한 득이다. 질소란 영양분을 땅속에 심어준 아카시아나무와 아카시아나무를심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옛 어른들의 수고에 고마워 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잘사는 나라도 이유는 다르지만 거지는 있고 빈부 귀천이 있다.
똑같이 잘살고, 똑같이 같이 가난 하자고 하면 그는 공산주의와 독재주의를 잘 모르고 북한을 찬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대부분 불평 불만이 많고 남을 핑게대는 생명체는 일 안하는 사람처럼 게어르다는 것이다.
하여간 나무의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가 만들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주제넘게 일단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보기로 한다
첫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멋있다고 하는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시대 문화를 떠나서 지금 우리들이 많이 선호 하는 수형 이이어야 한다.
세째 나무의 어름다움은 나무의 종류마다 특성에 따라 각각 그 기준이 달라여 한다는 것이다
네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나무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나무라야 한다
다섯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당당한 모습이어야 한다. 키가 적든, 크든, 굵든, 가늘든 상관없다
즉 관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현대인들은 예쁜것도 권력으로 착각하고 아름다움에 집착한다고한다. 늙으면 우짤라꼬 괜한걱정이다
독일에서는 "행운을 부러는 외모 불가능은 없다"라는 제목의 성형 쇼도 방영된적이 있다고 한다.
누가 잘생기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멋있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만에 예쁘고 성질이 모나기를 팥쥐어멈보다 더한 사람이라면 용서 할 수 없다.
나무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나무로 바르게 자라지 못했지만 관상가치가 있는 나무들이 인기가 있다.
아주 이상한 형상을 한 나무들이 조형 나무라고 하여 나무의 가치는 몇배가 더 있는 것들이 많다.
하여서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애를 먹게하고 고통을 감수하게 하면서 철사줄로 감고 당기고 밀고하여 관상적 가치를 강제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무를 보고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참 멋있다.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눈에 안경이다. 하여 결국 아름다운 기준은 스스로 에게 맞기고 말 일이다.
요즘은 개성이 있으면 된다고 한다. 누가 노래를잘 하느냐 보다 누가 더 개성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에 선호하기도 하는 듯하다.
나무들도 그동안은 멋지고 근육질인 뿌리를 숨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뿌리의 찬란함을 스스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간간히 타의든 자의든 많이 본다. 결국을 인간의 탐욕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큰일날 일이다. 뿌리는뿌리로서 찬란함을 보이기보다는 언제나 튼튼한 뼈와 근육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일게다 .
나무든, 사람이든 모두가 남이 보이기를 좋아하다가는 불어 오는 바람과 시련에 한방에 쓰러지고 생명의 위협가지 받을수가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평생 불구가 될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노하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꿋꿋이 살아가면서 푸르름의 본바탕을 잊지말고 살아야 행복할수있다. .행복한 사람곁에는 사람이 찾아오지만 불행한 사람은 피하려 하듯 나무도 마찬가지다.
푸르름을 지키는 나무들에겐 사람도 새도 나비도 바람도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모두 함께 행복 할 수 있으며 모두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가져다 줄것이다.
예로서 버려진 자전가 행복한 자유를 얻었다고 할 것인가? 묻고 싶다.
오늘도 초겨울 비를 맞으며 광화문 거리에서 무슨일로 물세례를 받는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나무에게 베워야할것이 참 많다.
사과의 꽃이 오로지 사과 속에서 죽은것 같은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무의 잘 생김을 이야기 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마친다
나무든 사람이든 성실히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당당하게 사는모습이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다움모습이 아닐까 싶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는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를 풀어보자 나무가 열심히 일을 할까? 아니면 사람이 더 열심히일을 할까?
아니면 나무를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스스로 일까? 태양 때문일까?
토양은 양귀비를 더 예뻐할까? 나이 많은 느티나무를 더 사랑할까 ?
오늘도 식물에게 배우는 삶이다.
나무의 입을 이야기 하고 보니 나무의 얼굴 나무의 아름다음도 생각을 해 보고 싶다.
나무의 아름다운 기준은 어디를 기준 할까 하는 생각이다
나무의 입술, 아니면 나무의 얼굴! 나무의 얼굴이라하면 나무의 수형을 이야기 해도 될까?
나무도 동양사람 서양사람 아프리카사람이 각각 다르 듯 열대지방 아열대지방 온대지방 난대지방에 사는 나무들이 제각가 다들 사는 환경에 따라 수형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잎의 크기도 나무의 키도 다 제각각 일 것이다.
못먹고 못사는 나무들도 잘먹고 잘사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대충 살아가는 곳이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 남한 수준이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구경 할수 있고 경제 사정도 중산층은 될 듯하다.
아카시아나무 같은 콩과 식물들을 옛 어른들이 지혜롭게 심어 두어 아카시아 나무덕분에 넉넉한 살림은 아니나 대충 남부럽지 않은 환경을 가진 것은 나무도 사람도 새마을 사방조림정신을, 노력의 덕을 톡톡히 보고있는 것이다. 거름기 한점없든 우리강산에 아카시아나무와 같은 콩과식물이 많은 수고를 한 득이다. 질소란 영양분을 땅속에 심어준 아카시아나무와 아카시아나무를심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옛 어른들의 수고에 고마워 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잘사는 나라도 이유는 다르지만 거지는 있고 빈부 귀천이 있다.
똑같이 잘살고, 똑같이 같이 가난 하자고 하면 그는 공산주의와 독재주의를 잘 모르고 북한을 찬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대부분 불평 불만이 많고 남을 핑게대는 생명체는 일 안하는 사람처럼 게어르다는 것이다.
하여간 나무의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가 만들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주제넘게 일단 내가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보기로 한다
첫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멋있다고 하는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시대 문화를 떠나서 지금 우리들이 많이 선호 하는 수형 이이어야 한다.
세째 나무의 어름다움은 나무의 종류마다 특성에 따라 각각 그 기준이 달라여 한다는 것이다
네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나무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나무라야 한다
다섯째 나무의 아름다움은 당당한 모습이어야 한다. 키가 적든, 크든, 굵든, 가늘든 상관없다
즉 관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현대인들은 예쁜것도 권력으로 착각하고 아름다움에 집착한다고한다. 늙으면 우짤라꼬 괜한걱정이다
독일에서는 "행운을 부러는 외모 불가능은 없다"라는 제목의 성형 쇼도 방영된적이 있다고 한다.
누가 잘생기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멋있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천만에 예쁘고 성질이 모나기를 팥쥐어멈보다 더한 사람이라면 용서 할 수 없다.
나무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나무로 바르게 자라지 못했지만 관상가치가 있는 나무들이 인기가 있다.
아주 이상한 형상을 한 나무들이 조형 나무라고 하여 나무의 가치는 몇배가 더 있는 것들이 많다.
하여서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애를 먹게하고 고통을 감수하게 하면서 철사줄로 감고 당기고 밀고하여 관상적 가치를 강제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무를 보고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참 멋있다.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눈에 안경이다. 하여 결국 아름다운 기준은 스스로 에게 맞기고 말 일이다.
요즘은 개성이 있으면 된다고 한다. 누가 노래를잘 하느냐 보다 누가 더 개성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에 선호하기도 하는 듯하다.
나무들도 그동안은 멋지고 근육질인 뿌리를 숨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뿌리의 찬란함을 스스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을간간히 타의든 자의든 많이 본다. 결국을 인간의 탐욕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큰일날 일이다. 뿌리는뿌리로서 찬란함을 보이기보다는 언제나 튼튼한 뼈와 근육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일게다 .
나무든, 사람이든 모두가 남이 보이기를 좋아하다가는 불어 오는 바람과 시련에 한방에 쓰러지고 생명의 위협가지 받을수가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평생 불구가 될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노하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꿋꿋이 살아가면서 푸르름의 본바탕을 잊지말고 살아야 행복할수있다. .행복한 사람곁에는 사람이 찾아오지만 불행한 사람은 피하려 하듯 나무도 마찬가지다.
푸르름을 지키는 나무들에겐 사람도 새도 나비도 바람도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모두 함께 행복 할 수 있으며 모두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가져다 줄것이다.
예로서 버려진 자전가 행복한 자유를 얻었다고 할 것인가? 묻고 싶다.
오늘도 초겨울 비를 맞으며 광화문 거리에서 무슨일로 물세례를 받는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나무에게 베워야할것이 참 많다.
사과의 꽃이 오로지 사과 속에서 죽은것 같은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무의 잘 생김을 이야기 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마친다
나무든 사람이든 성실히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당당하게 사는모습이 가장 멋지고 가장 아름다움모습이 아닐까 싶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는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를 풀어보자 나무가 열심히 일을 할까? 아니면 사람이 더 열심히일을 할까?
아니면 나무를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이 스스로 일까? 태양 때문일까?
토양은 양귀비를 더 예뻐할까? 나이 많은 느티나무를 더 사랑할까 ?
오늘도 식물에게 배우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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