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는 미래

상상하는 미래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는 끔찍한 말이 있다.
동물과 식물은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며 심지어 그들만의 미래를 상상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나무꾼이 동물과 식물들에 대한 의인화한 글에 의구심을 가지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의인화를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를 미리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오히려 인간만이 생각과 느낌과 미래를 갖고 있다는 사고야말로 인간중심 주의적 편견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미생물이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먹어야 하고(에너지공급) 먹으려면 경쟁해야 하고 경쟁하여 승리한 놈은 좋은 것을 먹으며, 먹으면 소화하여 배설해야 한다. 자기들만의 기호를(언어) 해석하고 물질을 생산하고 행동을 통해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동물과 식물들의 기호는 인간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고 이 세상에 속해 있기에 모든 생명은 기호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비인간적 창조물들과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신체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호와 더불어 그리고 기호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여러 방식으로 세계의 일부를 표상해주는 지팡이로서 기호를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들만의 기호는 우리를 우리로서 존재하게 한다.

. 이처럼 인간만의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게 되면 표상, 관계, 목적, 생명, 죽음, 사고, 형식, 미래, 역사, 소통 등의 인문학적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바뀔 것이다. 숲과함께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며 미래를 상상한다면, 인간만이 사고하고 미래를 갖고 있다고 말하던 기존 인문학적 관점과는 작별? 별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이 점에서 최근 인문학계의 새로운 이론적 흐름인 존재론적 전회를 이끄는 대표적인 저서로 평가된다. 존재론적 전회란 동시대 철학과 인류학을 필두로 하여 사회학과 생태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트렌드로서 생태위협,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의 부상과 더불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려는 경향이다.
 
학자들은 과학기술, 반려동물, 다수의 자연 같은 주제를 탐구하면서 인간을 특별하고 구분되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 다른 만물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획기적 관점 전환을 일으킨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처럼, ‘인간이 바라본 자연이 아니라 자연이 바라본 인간이라는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타자, 문화와 자연이라는 구별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이 측면에서 숲은 생각한다는 어떻게 문명과 야생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묻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숲을 관찰함으로써 오히려 인간 자신을 더욱 또렷이 보게 된다. 나무꾼은 숲속에서 인간 중심적 관점을 넘어 이 기묘하고 낯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도구와 방법을 찾아냄으로써 문명과 야생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고 숲과 인간, 자연사와 역사의 얽힘을 더욱 생생하게 풀어내는 생각이다. 우리는 명백히 환경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기호적이다. 다시 말해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호 과정의 산물이다. 생명이 활기 없는 물리적 세계와 구별되는 것은 생명체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한다는 사실 때문이며, 이러한 표상들은 생명체들의 존재에 본질적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비인간적 창조물들과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신체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호와 더불어 그리고 기호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여러 방식으로 세계의 일부를 표상해주는 지팡이로서 기호를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기호는 우리를 우리로서 존재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숲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가? 비인간적 세계의 사고가 우리의 사고를 해방시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숲은 생각하기에 좋다. 왜냐하면 숲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숲은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다. 우리 너머로 확장되는 세계 속에서 인간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숲은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어떤 함의가 있을까?
인간이 형식을 숲에 부과한 것이 아니다. 숲이 형식을 증식시킨다. 공진화는 상호작용하는 종들간의 규칙성과 습관의 호혜적인 증식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숲은 수많은 부류의 자기들이 상호 관계하는 방식에 힘입어 무수한 방향으로 형식을 증폭시킨다.
인간의 언어 너머에 기호작용이 있다는 것은 언어 너머로 확장하는 살아있는 세계의 기호작용과 언어가 이어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인간적인 것 너머에 자기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아의 속성들 중 일부가 자기들의 속성과 연속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모든 생명 너머에 죽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드는 부재하는 모든 죽은 자들에 의해 열려진 공간 덕분에 우리가 계속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그 길을 가리킨다.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 한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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