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 뒷산

앞산 뒷산
 
 
나무꾼이 어릴때 뛰어 놀든던 산은 **면 대신리 뒷산이다.
앞산은 해발 500m 정도는 될듯하다. 뒷산은 해발100m! 정도 가 될듯나즈막한 산이였다.
산의 이름도 없고 잘생겨서 좋은 별명도 없다. 그냥 앞산뒷산이 이름이다. 
그 앞산은 높았고 뒷산에서 주로 놀든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온몸이 흥분하는 짜릿짜릿한 추억이있다.
어릴 때 노는 재미도 있고, 운동도 하고, 경제적 놀이인 칡도 캐고, 도토리도 줍는 행복을 주는 산이였다.
올망 졸망한 뒷산도 여름이 되면 아카시아나무 그늘 아래서 녹음 짙은 버드나무 상수리 나무 몇주가 궁전 보다 낫다. 궁전이야 꿈에도 구경 못한 그림의 떡이다참 행복한 뒷산의 숲이 였고 숲은 친구간의 선후배간의 우정을 만들었고행복한 추억을 만들었다. 언제나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신비로웠다. 거짓말의 풍자적인 이야기는 더 많은것을 상상하게 하였고 특히 대 선배들의 월남전쟁이야기는 거짓말인지 정말인지도 모르고 신명나게 들었다. 재미있어 눈에 빛이 나기 시작하면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잔 심부름 한번쯤은해야 하는 일이 꼭 생긴다. 사소한 일반 심부름이면 왜 못할까? 참으로  나쁜 심부름이어 정말 힘이 들었다. 당시만해도 모두가  어려운  형편이였다. 그래서 그 짓꿋은선배는 아버지가 피우든 담배 한개비 훔처오기,  남의 밭에 심은 오이하나 따오기다. 재미난이야기는 심부름의대가로 계속된다.
 
당시는 앞산이 조금 높고 뒷산은 놀기 좋고, 왼쪽산은 평평한 산으로 묘지가 많아 낮에는놀기가 좋고 밤이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산이였다. 당시만 해도 왜그리 귀신들은 많은지 참 무서웠던 기억이다.
낮에는 묘등옆에 누워있으면  겨울에도 포근한 침대같고 녹색 구릉 너머 위엄 있어 보이는 먼 앞산도 지금 생각하면 어느 동네의 뒷산이나 옆산같기만하다.
모든 산은 멀리서 보면 앞산이고 가까이 있으면 뒷산이 대부분 이였다.
지금보면 우리가 앞산이면 그 산너머 마을에서는 사는 사람들에게는 뒷산이고 모든 산은 앞산도 되고 뒷산도 되는 앞뒤 붙은 하나의  정겨운 아름다운 산이다.
지금은 고향을 찾아가면 아카시아 나무도 상수리 나무도 버드나무도 낮이 설다. 우거진 풀과 잡목 나무들이 얼굴이 익숙하지 않다고 이제는 길을 막고 서있다. 고향을 자주 찾지 않아 얼굴이 익숙하지 못한가보다. 완전히 고향 사람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타지의 남이 되어있다.
짐승들 말고는 산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수신호 같다.
산이야 말로 참으로 환경적이며 생태적이고, 자연스런 자연이며 우주같다.
산은 산대로 산의 문화도 있고, 산의 야망도 있는 듯 하다.
산은 나를 보고 올 테면 와보라는 듯 과시와 함께 위엄도 있느 듯하다.
아니 나를 무시하고 자기도 클 만큼 컸으니 동등한 관계로 대하자는 듯하다.
억새풀은 아주 더 당당하다. 그러나 더 당당한 놈이 칡이다. 독선과 배려가 함께 하며 억새풀도 칡나무에게는 한발 물러서는 광경이다. 어디 억세 뿐이겠는가? 소나무도, 상수리나무도 버드 나무들도 칡에게는 꼼짝을 못한다. 심지어 전주대까지도 칡에게는 두손을 들고 살려 달라는 표정이다.
나무꾼이 낫이나 예초기라도 들면 당장 엎드려 빌 칡과 억새가 제일 당당하다.
그래도 아직 뜨거운 태양이 억새의 편이고 칡의 편이고 나무들의 편이라고 믿는 듯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을이 익어 닥아 온다는 신호이다.
농촌에서야 초복이면 벼가 한살이고 중복이면 두살 말복이면 세살이라 하지 않는가?
말복이 지나 추석이 오면 가을이다. 가을이 되면 그 유명한  가을이라는 닐케의 시가 생각난다.
참고로 닐케의 시를 소개 해보자
 
가을 날/ 닐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을 익게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 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히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칡들의 그 탐욕에도 나무들의 목표와 희망은 여유스럽다. 늘 그랬듯이 웃음의 여유다.
나무들에 비교하면 사람들의 일상은 왜그리 바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네 일상의 삶은 마치 경주하며 달리는 말의 질주처럼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리는 속도전과 다를 바 없다. 아니 고속도로의 차들이 무슨일로 그리 바쁜지 규정 속도마저 위반하며 경주라도 하는 듯 보인다.
우리들의 일상이 나무들과 경주하고 풀들과 경주하고 곡식들과 경주하고 이웃들과 경주하고 참으로 바쁜 세상이다.
속도전에 참가한 이들은 누구나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혹은 처지거나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
 
앞뒤를 가릴 틈도, 옆을 살필 겨를도, 위를 쳐다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달리기 위해서 달린다. 그러다보니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목적이나 지향점 같은 것은 모두가 같거나 비슷한데  오히려 이 속도전의 세계에서는 자기들이 하는 전문적인 일조차도 부차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다.
결국 삶의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사람들은 다 바쁘다. 사람이 바쁘니 세상도 바쁘다.”
세상, 사람 가리지 않고 점점 더 바빠지는데 순서가 없으니 앞뒤 가릴 틈이 없다. 그러니 더욱 앞만 보게 된다. 아니 보는 곳이 앞이 된다. 가는 길을 앞이라 여기며 간다.” 사람과 삶과 세상이 단순하지 않고  그만큼 복잡해지고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이겠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그러하다면, 병이라 해도 보통 중병은 아닐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득에 모은 재물이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병원치료비로 한번 두번  여러번 가저다 주어야 하는순서가 될까 겁이난다.
우리가 보는 앞산과 뒷산은 식물성의 사유를 환경과 생태의 장으로까지 확장하여 녹색철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또 그에 따르는 일상의 실천적 덕목들을 제시하면서, 환경과 생태의 문제는 바로 사람의 삶이 문제임을 다시 한번  모두가 깨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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