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고향거목
향기로운 고향거목
고향의 뒷산, 고향의 앞산은 수 많은 이야기를 품고도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쉿!!! 모두가 비밀이다. 거목은 말한다. 남 이야기 하지말고 자기 이야기만 하라고....
고향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나를 마중나와 반기는 것이 앞산이고 뒷산이고 옆 산이다.
아직도 푸른 잎으로 푸른 기상으로 나를 반기며 격려하고 勇氣를주는 낮익은 나무들이다.
내가 고향을 향해 가니 앞에 보이는게 앞산이고 돌아서면 뒷산이고 좌우의 산들이 옆 산이다.
뒷산 아래 내가 살든 고향 집이 있고 부모와 함께 잠을자고 아침에일어나 일하며 농사를 짓고 살든 농촌인 생명의 터전 이였다. 다행히 고향에는 친구들의 부모님들 몇 분이 아직도 고향 마을을 지키고 계신다.
고향을 지키는 어르신들의주름 깊은 모습이 성자님들의 얼굴이고 우리가 믿는 종교적 역사적 어르신들의 모습같다. 아름다운 삶의 무늬는 이미 주어진 성자들의 모습이다. 친구들의 부모님이시지만 성자같은 부모님들이 고향을 지키고 건강하심이 진심으로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부모님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고향이지 고향산천이 우리마음의 고향인것 만은 아닌듯하다.
고향에 부모님들의 산소라도 없다면 우리들의 고향의 의미는 어떨까 하는생각이다.
친구들의 부모님들 어른분들이계시지 않는다면 고향은 벌써 이국적인 마을일것이다.
고향에는 마을 어귀에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리들을 밤낮 기다리는 거목이 있다.
두서없이 글을쓰는 내게 용기를 주는것도 고향의 거목덕분이요, 노목의 강건한 기상 덕분이다.
그 거목이 고향의 당산나무이다. 그리고
고향을 지키는 고목나무이고 거목이다.
고향을 가장 대표하여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발도 옮기지 않는 가장크고 오래된 든든한 역사적 거목이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과 함께 고향을 지켜오든 희망의 녹색 나무였고
그 녹색은 고향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든든한 지킴이였고 표상이였고 봄에는 새싹의 녹색으로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으며 여름에는 열정과 열망을주었고 땀흘리고 일하다가 쉴수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쉼을 주는 고마운 거목이요 고목이였다. 가을에는 겨울을 준비하라고 아리켜 주었고 결실의 축복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겨울엔 거목도 고목도 나뭇잎을 틀어버리고 물기를 버리고 저장한 영양으로 겨울을 나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거목이 아직도 당당히 거목으로 고목으로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갑다.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해도 나의 소문도 알것이고 나의 가족사도 알듯하다.
내가 살든 마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뒷산 동네어른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더 많은 거목이다.
그래도 남의 이야기 만큼은 사생활 보호차원에서 철저히 비밀이다. 그 의리에 믿음에 누구보다 고맙다.
수십년 세월속에 나라경제는 좋아지지만 농촌의 경제는농업보다는 상업의 발달과 상업보다는 준공업의 발달로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해마다 매년 농촌 경제는 고향을 들었다가 놓은 자리는 거미줄처럼 잔주럼만 쌓이고 농촌의 노인들도 노목들도 거목으로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것이다.
나무꾼이 어릴때만 해도 고향마을에 여러 면민들을 모시든 기차역이 있었고 그 기차역에서 수많은 화물과 손님들을 편하게 나르는일을 독점 했다.
그 기차역 덕분에 많은 손님이 오가는 당시의 농촌 경제활동이 우리마을은 그나마 농촌경제와 약간의 상업적 분위기가 많이나는 활발하든 고향이였다.
당시의 교통 수단 이라고는 기차 밖에 없든 시절이야기다. 그리고 화물트럭 대신 마차와 우마차가 고작 이였다. 그러다가 시골에 리어커가 나왔고 한참후에는 경운기가 나왔다.대단한 발전이다. 이제는 대중교통도 좋고 각자 자가용한대 없는집이 없다 보니 기차는 손님 한사람타지않는 간이 역이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당시의 나무꾼이 살든 시골 마을에 경찰서 역활을 하든 지서가 있었고, 짜장면집이 있었고, 약국, 담배집, 국수만드는 국수집, 기름짜든 기름집, 세탁소, 사진관, 두부집, 묵집, 마을가게, 술을 만드는 술공장도 있었고, 정미소, 선술집, 약방, 녹그릇을만드는집, 농협과, 재건학교, 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더 발전 발달되었어야할 그 시골이 더문 더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시는 20~30여가구도 안되는 그런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구수가 줄어드는시골도 교통이 좋으니 주변 도시로 학생들이 나가고 학생들이 줄어드는 시골초등학교는 교문을 닫게 되었고 결국은 폐교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정들고 근사한 장소라도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어떤 장소라도 ‘사람’이 없으면 경제가 번성할 수가 없다. 당시의 이동 수단은 기차 뿐이니 십리 이십리, 삼십리길을 멀다않고 기차역으로 와서 이동을 하였다. 당시 서울까지 완행열차 차비가 200원정도 이였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셨다.
고향서 서울까지는 500리길이 넘고 지금교통비는 약30,000원정도의 차비일것이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여하간 그래도 늘 그리운곳은 고향이다.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과 고생하든 농촌 생활의 추억들이 정말이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고향이라면 뒷산과 동네와 만나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을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뒷산 마을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은 뒷산 앞산 그리고 정자나무인 거목의 생각이 절로 난다.
뒷산에 새겨진 우리 추억의 모습이 생각나며 마을은 뒷산으로 연장된 마을의 풍경이다.
마을에서 보이지 않던 몇 걸음 거리의 뒷산에 보이는 것이 또 있다. 뒷산이 마을의 연장임을 알게 하는 사실과 감정이 이웃을 하고있다. 또한 웃 마을 약수터와 뒷산이 만나는 접면 사이에 무수한 장면이 스며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근사한 장소라도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어떤 장소라도 ‘사람’이 관계되면 의미가 생김을 일깨운다. 그래서 일까? 어릴적 약수터에 지금은 물이 말라 없다. 그러니 누구도 찾는이도 없다. 그러나 그 약수터는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보고 싶은 사람이 약수터에 올때면 괜히 물을 떠로 가기도 했다. 그시간 약수터에 가면 만나고 싶은 그 누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약수터인지도 모르겠다. 말없는 뒷산과 약수터는 말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하다.
사람이 나무보다, 산보다 훨씬 수선스럽고 변덕스러움을 우리가 알게 한다. 적은 말은 걸으며 들을 수 있지만 많은 말은 머물며 앉아서 들어야 제격이다. 누구나 잠시 머물 수 있는 장소로서의 약수터에 비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심심해 보이지만 긴장이 묻어나고, 남의 일 같지만 내 모습 같고, 밋밋해 보이지만 짜릿한 정경들이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 곳이 약수터같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살아가는 방법도 많이 변했다.
그런데 세상에... 말도 안되는 말씀을 진지하게 하시고 실천하는 분이 계신다.
다들 편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현 시절에 ‘불편하게 살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다니 어떻게 생각을 해야할까? 우리가 사는 사회환경이 편해질수록 미래의 세상 지속가능성에서 멀어지는 자연스런 삶의 그 모순을 지적하며, 삶의 태도를 반성하자는 어느 어르신님의 불편하게 살기 가난한 동네의 꿈을 담은 ‘불루존을 만들자는 말씀이시다. 생각하면 그 마을이 지금의 나의 고향 마을이며 기찻길옆 시골집이 우리마을 이다.
그러고 보니 녹색을 좋아하시는 열정, 푸른 산을 좋아하시며 나무한그루도 귀히여기시고 사랑하시며 나뭇가지 하나도 생명체로 보시고 자르지 못하게 하시는 자연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어느 시골의성자같은 촌장님이 생각이 절로 난다. 그 어르신이 고향의 거목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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