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같은 정의
나무 같은 정의
정의(正義)의 이름으로 답하라
정의란 하늘의 뜻과 일치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의미하는듯하다.
정의란 누가 보아도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를 뜻하는듯하다.
정의란 한자 옳을 '의(義)'는 '양(羊)'과 나를 의미하는 '아(我)', 두 글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정의란 경건함과 엄숙함을 말한다는 나무꾼의 생각이다.
서양에서는 정의(正義)는 두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여신의 모습으로 정의를 표현한다.“그는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야.” 라고 할 때, 우리는 개인적 덕목으로서 거짓말을 하지않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을 정의라고 말하고싶다.
정의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다.
세상에 정의란? 거짓으로 공정한것이 아니고, 거짓인 정의는 없다.
세상에는 영원한것도 없다.
세상에는 공짜란것도 없다.
세상에 남을 속이는 정의도 없고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정의는 더더욱 없다.
도덕적 가치를 벗어나는 공정함과 정의도 없고
윤리적 가치를 벗어나는 공정함과 정의도 없다.
남을 힘들게 하거나 피곤하게 하는 정의도 없다.
자신만을 위한 일은 그 어떤것도 정의가 아니다.
나무를 심으려고 구덩이를 파다가 보면 땅속의 돌들이 내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는경우가 종종 있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 돌덩이를 만나면 불평이고, 심겨지는 나무도 돌덩이를 만나면 불평이고, 땅속에서 이끌려 나오는 돌덩이도 불평투성이 인듯하다.
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땅속이 평화롭고 안락할것같다. 세상 밖에 나오니 햇빛을 보게 되고, 빛을 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빛을 보게 되니 속은 촉촉해도 돌덩이의 피부가 거칠어 진다. 그뿐만은 아니다. 괭이에 부딪히고, 삽날에 부딪히고, 사람에 의해 내어 던저진다. 버림받는 돌 같다.
땅속에 있든 돌이 땅속을 나오니 심란하다.
낮엔 햇볕이 뜨겁고 밤이 되면 찬이슬에 얼음이 언습하여 춥다.
편안한하기만 하든 땅속의 행복이 땅 밖을 나오니 하늘을 나는 새를보면 하늘을 나르고 싶고
하늘의 높은 구름을 보면 어디론가 뭉실뭉실 평화롭게 날아가고싶어질것이다.
조용하든 땅속에서는 나무의 뿌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아도 돌을 비켜서고 돌이 움직일때는 든든히 잡아도 주는 뿌리의 고마움도 있었다. 그러나 땅속에서 땅 밖으로 세상을 나와보니 이제는 커다라케 자라는 나무들을 보고는 나무들 처럼 쑥쑥 자라고도 싶어진다.
눈이 오면 눈을 눈처럼 세상을 덮어 보고 싶고
비가오면 비를 보며 세상을 께끗이 씻어 주고싶기도하다. 그러나 돌덩이가 자라거나 하늘을 날수도 없다.
그러다가 하늘을 날아가든 새가 똥을 누면 새똥을 맞아야 한다. 이 모두가 인간들의 욕망 때문이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나와보니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얼키고 설키고 정의도 없고, 진실도 없고, 거짓과 유혹과 잘난채 하는 사람들의 위선 뿐인 것 같기도 하다.
잘못을 하고도 잘못 인줄 모르고 국가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는 듯 잘날듯 멋있는듯 정의로운듯 당당하다.
깨닭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선생이든, 중이든, 신부든 ,목사든, 지식이 있는사람이든, 가진자든, 건강한자든, 깨닭음이 없는인간은 정의로운인간이 아니라고 치부하고 처다 보지도 않고 싶다.
왜냐하면이유는 많지만 내 삶의 해야 할일의 길목길목이 당장 바쁘고 힘들고 고달프고 바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갈 길은 멀고도 멀다. 하고 싶은일도많지만 해야할일도 많기 때문이다.
神은 나무에게 고유한 빛깔로서 푸른빛을 주셨지만 환경과 가을이란 계절이 나무를 붉게 만들었다.
서서히 단풍이 들고 단풍은 나도 모르게 붉고 붉게 물이 들어가고 삼천리 금수강산이 붉게 물들어 간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늘 푸른 빛은 스스로 자신의 빛깔을 헤아리지못한 나를 위한 냉철한 잠언서 이기만 한듯하다.
그래도 나무들은 정의를 위해 겨울과 밀약(密約)하지 않고 낙엽을 떨구면서도 당당히 자연의 이치를 자연의 섭리를 위하여 당당히 자기의 속내와 자기의 자리를 지킨다.
나무들은 자연과의 약속, 자신의 사명과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서는 누가 뭐래도 당당하다.
나무들은 오히려 작은 바람결에도 금방 세상 실음 날려보내고 경쾌하게 춤을 춘다.
나무들은 푸른 빛을 주신 창조주를 사랑하고 나무를 심어준 손길에게 감사한다.
나무들은 2019년 한해도 예전같이 휴일도 없고 52시간 근로시간에 메여 보지도 않았다.
주어진 시간에 할일다하고 보수와 관계없이 대가에 관계 없이 열심히 최선을 다 하였다.
나무들은 쉼 없이 일 하도록 주어진 삶을 대 자연의 태양이 고맙고 푸른 빛이여서 좋았다.
나무들은 단 하루의 국경일도, 휴일도 없이 아름다운 삶의 무늬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황야의 의인이 자기 할일 다하고 대가도 없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자연에 평화를 심어놓고 말없이 떠나는 의인(義人)같이 푸르든 잎들도 낙엽이 되어 미지의 자연세계로 떠나기로 하였다.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의 푸른 기운은 금년에 태어난 잎이 내년까지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2020년 새 잎이 자라면 황야의 의인처럼 그 잎 또한 사라질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장면인가?
소나무는 두서없이 수선을 떠는 내게 강건한 기상이 무엇인지 보여 주기위해 늘 푸른잎으로 독야청청 하는가보다.
소나무를 보면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의 깨달음을 얻을 소재가 몇가지 있다.
특히 소나무의 줄기에 깊게 패인 골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어르신들의 깊은 주름살이 볼수록 성자의 얼굴을 보는 듯 험난한 삶을 잘 살아온 행복한 선물인듯하다.
소나무가 그렇다.
소나무의 신록은 나의 흐릿한 눈을 맑게 닦아 주었다.
모든 나무들은 바라볼수록 보는이의 마음을 무한한 평안으로 안겨준다.
숲은 이루 말 할수 없이 자연의 아름답고 고상한 빛깔로 물들어 가고있다.
하루해가 지는시간 어두움이 잠자리 날개처럼 얇게 숲을 안기 시작한다.
숲의 거룩한 밤 기도를 위하여 모두들 온순해지는 것이 깨달음이리라
한해가 지나고 봄이오면 벛 꽃은 자연을깨우는 옷이 젖지않는 봄의 꽃비였다.
나무들의 벚꽃이 떨어지면 마치 장마철 봄비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뭇잎은 뿌리보다도 높은 자리에서 시들지도 않은 채 왜 굳이 단풍까지 들어서 뿌리곁으로 내려오는것인지 나무에게 묻고싶다.
나무들은 세상 비밀 다 알면서도 한마디도 말이 없이 마음으로 담고 가는가 보다.
그 비밀의 말을 누구에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보다 낫다는생각이다.
사람들아 나무 에게 배우자
사람들아 꽃잎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고싶다.
사람들아 나뭇잎처럼 사랑하고 헌신하고 떠날때는 황야의 의인같으라고...
사람들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쇄원 정원으로 끌어드린 풀한포기를 보라고 하고싶다.
사람들아 단풍잎이 떨어저서 한껏 기댈만한 울퉁불퉁한 막돌하나도 어디에고 없단다.
돌은 돌대로 걱정이다. 눈보라 치는겨울날 나뭇잎하나 자의로 맨몸뚱이 하나 덮을수가 없다.
나무는 눈보라치는 겨울에도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게 선 나무들이 두팔 벌려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 하는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기도 하는걸까! 궁금하다.
우리들이 숲을 보고 하는 상상이 감사와 사랑으로 정의로워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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