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나무다.
나무다.
나무는 나무다.
말 한마디 없이도 행동하나 없이도 나무의 손짓 나무의 미소로 마음이 끌리기도 하는 나무다.
나무는 어찌하라는 지시는 없어도 되려 순순히 따라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항상 말로서가 아니라 항상 자신의 행위 철학으로 감명하는 나무의 속에는 과연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이 숨을 쉬고 있는 느낌 그것이다.
곱게 장식하던 푸른 잎 탄소동화작용으로 영양공급하고 대기에 수분을 공급하며 가진것을 다 버리면서도 나무는 한마디 원망을 모른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연의 우주의 순리에 따르는 나무는 중후하다.
나무의 관용에서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한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가진 것을 버릴 줄 아는 나무는 버릴 때는 한점의 미련도 없다.
아니 미련이 없다기보다는 나무는 미련에 연연하지 않는다.
욕심을 버릴 줄 알기에 나무는 언제 어디서나 떳떳한 모습이고 욕심에 미련이 없기에 그의 행적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가진 것이 없지만 누구보다 가진 것이 많은 낙엽 진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무의 삶을 배우게 된다. 나무와 함께 하는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를 재삼 숙고하게 한다.
나무는 그렇게 말이 없지만 말이 많은 우리보다 더 고귀한 말을 하고 있다. 나무는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나무의 몸에는 서릿발 같은 빛이 번쩍인다. 나무에게는 아프다는 소리가 없다.
오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축하여 줄 뿐이다.
오직 사는 길에서 감수한 천고의 진리를 행위 철학으로 대신할 뿐이다. 만약 나무에게도 말이 있다면 그 나무는 내가 정리하려는 나무는 아닐 것이다.
말이 없기에 말이 궁금하고 말이 없기에 말을 듣고 싶은 것은 그의 행위에서 기립하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란 자신 밖에서 울려 나올 때 비로소 값진 것이다. 나무의 언어는 그래서 나무만이 가지는 것이고 오직 나무의 말을 정리할 때만이 말이 되는 것이다.
나무는 말이 없어도 나무의 한 생을 베여보면 숱한 말을 속에다 두고 있다. 오직 그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을 뿐이다. 하기에 우리는 나무의 말을 들을 수 없었고 나무의 아픔을 알아주거나 감내할 수는 없었어도 나무에게도 필경 말 못 할 깊은 속은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무를 대신하여 말하고 싶다. 나무가 들려준 나무의 언어를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망발에 가까운 나의 소망이지만 나는 나무를 마주하면서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려는 욕심이 생긴 것 만은 사실이다.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면서 나의 말을 조금이라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려는 욕심으로부터 나는 나무의 삶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경 나무가 나에게 준 것은 언어가 아님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무의 언어는 나의 정리로 끝나는 것이 아님도 인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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